[Slow Sip] 그림 속에 들어왔다, 맛도 멋도 : 포천 술빚는 전가네

2019. 01 Classic Archive

“…가라앉아있을 땐 미처 몰랐는데 ‘막걸리’하고 흔들면 비로소 제 색을 드러낸다. 아련한 기억들을 내 속에 쏘아댄다…”

어떤 단어를 뱉었을 때 어떤 이미지로 굳어지는 게 있다. 막걸리가 그렇다. 막걸리는 맛과는 상관없이 나를 아주 오래전에 지나온 어린 시절로 데려가 버리곤 했다. 아마 아빠는 종종 내게 막걸리 심부름을 시켰던 것 같다. 그 일이 또렷이 기억나질 않는 걸 보면 당시의 내게 흔하고 기꺼이 할 만한 일이었을 게다. 아빠는 막걸리를 정말 좋아했다. 크림색 한 모금 정도의 찌꺼기가 남은 막걸리 빈 병이 현관 앞에 쌓여있는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막걸리는 어쩌면 색도 그렇게 따뜻한 빛일까? 아마 그 원형이 우리네 주식이라서 그럴 것이다. 막걸리는 쌀과 물, 누룩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 쌀 없이 한국인이 어떻게 사나. 막걸리는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술이다. 전국의 양조장을 하나씩 찾아가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거창한 건 아니고, 그저 방랑하는 마음으로 다니는데 우연인 듯 우리 술을 빚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 짠, 한 번이면 풀어지는 작고 소중한 길을 걷는 마음으로!

산정호수 이다지도 맑은 곳에서, 술 빚는 남자 전기보

“아주 좋은 날을 골라오셨네요!” 술빚는 전가네의 전기보 사장님이 넓은 앞마당을 쓸며 그제 만난 지인처럼 첫인사를 건넨다. 첫 취재로 들른 포천의 작은 양조장은 온통 하얀 눈에 덮였다. ‘운치란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실감하며 ‘주막’ 안에 들어갔다. 술은 주막 가까이에 있는 양조장에서 따로 제조하고, 술빚는 전가네의 술을 맛보거나 구매하려면 이곳 주막으로 오면 된다. 술도 술이고 든든한 한 끼나 발효음식 위주의 안주도 맛볼 수 있다.

전기보 사장님은 술도 빚고, 주막에서 손님도 맞고, 강연도 나간다. 대기업 임원, 행복연구소 소장, 대학교수, 사진작가, 주막 주인, 양조장 사장. 각자 연관도 없는 일이 한 사람의 생에서 이뤄졌고, 이뤄지고 있다. 그는 현재도 강연을 다니느라 바쁘다. ‘어떻게 하면 막걸리를 잘 만들 수 있나?’가 아닌 ‘은퇴 후의 삶’이 강연의 핵심 주제란다. 특유의 욕심과 열정으로 발 담그면 빼는 일이 없으니 그가 밤을 새우고도 할 수 있는 좋은 이야깃거리다.

Insight. 술빚는 전가네

“사진을 찍으러 중국 저장성에 갔는데 친구가 제 배낭에서 막걸리 세 병을 꺼냈다. 직접 만든 술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런 게 불법인 줄 알았는데 자기가 마실 술은 직접 만들어도 문제 될 게 없다고 하더라. 일명 가양주였다. 맛이 감동적이었다. 나도 이런 술을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상해에 교육하는 곳에 당장 전화를 걸어 이미 만석이라는 자리 하나를 용케 빼서 술을 배웠다. 말했듯이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는데 열심히 하고 나니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술을 만드는 장인이 되었다.(술빚는 전가네는 ‘2018 우리술 품평회’에서 탁주 부문 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당시 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대학교수를 하며 행복연구소를 운영했고, 교수로 정년을 맞이하면 사학연금도 보장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재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강연을 가면 ‘좋아하는 일 하세요, 은퇴 후에 재미나게 사세요’ 하면서 정작 내 삶은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술 빚는 일을 사업으로 하리 결심했다. 다들 반대했다. 양조장은 돈이 안 된다고. 아내와 어머니에게 주막 일도 부탁했는데 바로 퇴짜를 놓았다. 그럼 어쩌나? 전부 내가 해야지.

내가 나고 자란 고향, 포천에 2014년 10월 양조장 문을 열었다. 떡, 식초, 간장, 사찰요리, 양식, 한식, 중식 다 배웠다. 주막을 연 것은 술을 만들어도 판로가 없다고 해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우리 양조장은 전국에서 제일 작은 양조장을 표방하고 있다. 15평 규모로 아주 작은데 거기서 온갖 정성과 시간, 비용을 들여 맛 좋은 술을 빚고 있다. 돈만 바라면 주막도 양조장 일도 못 할 짓이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텨야 할 때 좋아하는 일이면 버텨낼 수 있다.”

한 입 머금은 순간, 거짓말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포천은 막걸리의 고장이나 다름없다. 백 년 가까이 된 양조장도 있고, 이동, 일동, 포천, 내천 등 이름난 막걸리만 해도 몇 개나 된다. 그들의 역사에 비하면 햇병아리에 불과한 술빚는 전가네가 우리술 품평회에서 큰 상을 받았다. 모두가 깜짝 놀랐고, 사장님은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탁주 부분은 세 개 상을 수여하는데 그중 대상, 우수상을 싹쓸이 했다. 한 병에 만 원이 넘는 막걸리 가격에 사람들은 놀라기 일쑤. 전기보 사장님은 찾아온 손님에게 아무 말 없이 술 한 잔을 권할 뿐이다. 다들 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몇 년이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 누룩전의 맛

과연 내게도 그 결과가 통할까? 마음의 소리를 읽었다는 듯 전기보 사장님이 양조장에서 두 달간의 숙성을 거치고 있는 ‘동정춘’을 긴 국자에 담는다. 발음도 어려운 ‘쌀 흩임’ 기법으로 만들어진다는 조선 3대 명주를 복원한 동정춘이다. 그 시대에도 아무나 마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 입 머금은 순간, 거짓말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방금 들은 말들이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로 생긋 흘러나간다. 달큼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데 ‘술 맛이 어떻게 이래요?’ 소리만 메아리친다.

동정춘은 올해 5월까지도 라인업에 없던 술이었는데 이번에 수상도 하고 찾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원래는 궁예의 눈물만 열심히 만들면 되었는데…’라는 전기보 사장님의 행복하고도 볼멘 비명이 이어진다. 당최 재주가 많은 사람은 쉴 수가 없는 법인데 사장님은 내년에도 세계 일주로 얼마간은 주막을 비우고 방송과 강연도 쉴 생각이 없단다. ‘동정춘’을 맛보려면 어떻게 하냐고 진심으로 염려가 되어 물었더니 ‘인터넷으로 살 수 있어요. 택배도 가능해요.’라고 한다.

하지만, 사장님이 안 계시면 누룩으로 만든 전가네의 누룩전은 정말 맛볼 수 없다. 각종 견과류를 넣은 누룩전은 색도 곱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감자전도 아니고, 호박전도 아니고, 누룩전이다. 흔치 않은 데다 맛까지 좋으니 반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산정호수에 선녀가 내려온다면 코스로 전가네 막걸리와 누룩전을 꼭 먹고 다시 하늘로 사뿐히 올라갈 것만 같다.


🍶 술빚는 전가네의 대표작

  • 산정호수 동정춘: 조선 3대 명주 복원. 구멍 떡을 쪄서 빚는 까다로운 기법으로, 말로 표현 못 할 달큰한 맛과 향이 특징. (2018 우리술 품평회 대상)
  • 궁예의 눈물: 명성산의 억새 즙을 넣어 만든 이양주1. 한 서린 이름과 달리 깊은 풍미를 자랑함.
  • 배꽃 담은 연: 찹쌀을 연잎에 쌓아 빚은 백주. 산미가 강해 식전주로 일품. (2018 우리술 품평회 우수상)
  1. ‘궁예의 눈물’을 비롯해 상 받은 술 모두 이양주로 만들어진다. 밑술에 다시 덧술을 하여 숙성하는 것인데 쌀의 당화, 효모균이 생성되는 중요한 과정이다. ↩︎
Editor’s Note

2019년 1월호 매거진에 실렸던 이 기사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좋아하는 일이어야 버틸 수 있다”던 전기보 대표님의 말씀은 오늘날의 저에게도 여전히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여러분의 ‘버티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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